From. 네이버 블로그 (2005.02.01)


여군동 기자, 책으로 박노자를 만나다
 

박노자 - 당신들의 대한민국 (10) 일그러진 증오와 멸시의 논리

인터뷰: 네이년 뉴스 여군동 기자(이하 여), 박노자 교수(이하 박)

여: 교수님, 이제 교수님과 함께하는 마지막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리 많은 이야기를 하지도 못한 것 같은데 이렇게 시간이 지나버리다니 아쉽기 그지없습니다.

박: 시간과 공간의 한계로 인해 저도 많은 이야기들을 전해드리지 못한점 심히 아쉽게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이 있지 않겠습니까?

여: 그렇겠지요, 그럼 오늘은 마지막으로 어떤 이야기를 해 주실 생각입니까?

박: 예, 오늘은 최근 외국인노동자 문제등으로 한국 사회의 하나의 이슈가 되고 있는 인종주의 내지는 인종차별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합니다. 요새 워낙 외국인에 대한 배타적이고 적대적인 생각으로 인해 발생하는 사건등으로 인해 외국인을 배척하는 분위기가 옛부터 내려온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처럼 생각을 하게 되는데요. 실제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가까운 조선시대를 보아도 인종차별이라는 용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고 기껏해야 우리와 중국인, 그리고 오랑캐 정도로 구분하는데 그쳤죠. 또한 민족의 우열을 구분하는데 선천적 요소라 할 수 있는 인종이 아니라 후천적 요소인 예법을 그 기준으로 삼았답니다. 그래서 아무리 미개하다고 비웃었던 여진족도 예법을 익히면 대접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심지어 박지원은 '허생전' 을 통해 보수적인 조선마저도 비난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에게 있어 인종은 별로 중요하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던 조선이 서양에서 생겨난 인종주의를 수용하게 된 것은 바로 개항 이후였죠. 당시 서양에서는 인종주의가 산업혁명과 영국의 인도 식민화 이후 그들이 자신에 대한 우월성을 가지면서 급속하게 퍼져나갔죠. 이런 인종주의가 조선의 지배층이 접촉한 제국주의 국가의 핵심 이념이었으니 인종주의가 퍼질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또한 인종차별론을 처음 접한 개화파 양반 귀족들이 극심한 엘리트주의에 빠져 있었던 것도 이를 널리 퍼지게 하는 원인이 됐죠. 내부의 만민평등도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던 그들에게 백인이 '미개인' 을 차별함이 그다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을 테니까요. 게다가 조선의 세계체제 편입, 부국강병의 논리에 휘말려 무조건 제국주의 국가를 배워야 한다는 강박관념까지 겹치며 사람들은 이 문제를 여과없이 받아들이게 된 것이지요.

여: 생각해보니 그렇군요. 조선시대가 아니라도 고려시대나 삼국시대도 그렇게 인종간의 우열 같은 것을 주장하는 사례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그때가 지금보다 외국에 대해 훨씬 개방적이었다는 생각도 들구요.

박: 그렇습니다. 개화기의 대표적 지식인이었던 유길준과 윤치호의 예를 통해서 그 당시 인종주의의 현실을 살펴보지요. 먼저 유길준은 백인종은 침탈자인 동시에 자애롭고 선진적인 '문명의 선도자' 라는 이중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길준은 미국의 서부개발등으로 헌신짝처럼 내동댕이 쳐진 인디언들의 불쌍한 현실을 그들이 원래 '개량조차 불가능한 구제불능의 천성적 야만인' 이었기에 자초한 현실이라 판단해 버렸죠. 

이러한 인종주의 및 강력한 국가주의는 근현대 한국인의 집단의식형성에 큰 역할을 했고, 지금 외국인에 대한 우리의 배타적인 시선은 다 여기에서 연유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길준은 이런 인종주의적 사고를 갖고 있었음에도 외국인을 귀천과 무관하게 도리와 정의로 대접해야 개화국의 칭호를 얻을 수 있다며 이를 어느정도 경계하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미국에서 오랫동안 유학생활을 했지만 유교적인 가치를 버리지 않고 소중히 생각했던 그다운 모습이었죠.

여: 하지만 윤치호 같은 인물들은 전통적 가치를 완전히 버린 채 내면은 서양인과 같아졌을테니 유길준에게서 보이는 저런 면도 찾아보기 힘들었을 것 같네요.

박: 좋은 지적이네요. 윤치호 같은 경우 일제시대에 선 실력양성 후 독립운동을 주장하며 식민지배는 조선의 숙명이다라고 말했었지요. 그의 이런 생각은 한국의 자강운동, 문화적 민족주의 등 근현대 지배층의 근대화 지향 정치운동의 친일화에 많은 영향을 끼치기도 했는데요.

치호는 미국 생활을 하면서 미국을 닮을려고 많은 노력을 했지만 무시무시한 인종차별에 시달렸습니다. 그랬던 그도 힘의 논리에 매료되어 적자생존 위주의 사회진화론과 인종차별의 합리화를 교묘하게 연결시키게 되었죠.

윤치호는 세계적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중간에 선 '매판형 지식인' 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데요. 그의 매판형 지식인의 모습은 중국인과 조선인을 멸시하면서도 백인에게 모욕을 당하면 그들에게 적개심과 복수심을 느꼈던 이중적인 태도에서 잘 드러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후에 그와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통해서 인종주의적 관점을 계속 사람들에게 주입하려 했었고, 실제 독립신문을 살펴보면 그런 주장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하실 수 있을 겁니다.

여: 결국 이런 인종주의적 관점이 인종간에 서열을 구분짓게 하는 것을 당연하게 만들고, 나아가 자강파들이 친일로 돌아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셈이군요.

박: 예, 인종주의적 관점에 물든 그들은 좀더 시각을 좁혀 황인종도 단계가 있다고 생각했고 그 맹주로 단연 일본을 꼽았습니다. 결국 열등한 조선인들을 개조해 황인종의 맹주 일본을 따라 백인들과 맞서는 미래의 인종전쟁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습니다. 참으로 무섭고도 안타까운 부분입니다.

여: 특히 요즘들어 역사에 대한 논란이 많고 세계화 물결등으로 인해 인종주의니 민족주의니 국가주의니 하는 문제들을 많이 거론하다 보니 저도 예전에 알지 못했던 것들을 정말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이 사회가 어떻게 나가야 하는지, 그렇기 위해서 우리가 알고 넘어가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다시한번 생각하는 기회가 되어 기뻤습니다.

박: 미약하나마 도움이 되셨다니 기쁘군요. 더 나은 한국과 한국인, 나아가 전 세계의 평화를 위해 한걸음 한걸음 모두 나아가야지요.

여: 예,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아쉽지만 이렇게 교수님과의 시간을 마쳐야 겠네요. 디음에 인연이 된다면 또 찾아뵐 수 있었으면 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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